찬란한 언어 뒤에 드리운 그림자 앞에서

“미당은 많은 모색과 다양한 변모를 보여주면서 그때마다 최고의 작품 수준을 유지한 시인이다. 어느 것 하나 버릴 것이 없는 그의 1천 편이 넘는 시업(詩業)은 ‘단군 이래 최대의 시인’이라는 호칭을 자연스럽게 만들어준다. 아무거나 붙들고 무슨 소리를 해도 시가 되는 도통한 경지에 이르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.”

유종호 저(著) 《시 읽기의 방법》(삶과꿈, 73쪽) 

미당 서정주는 한국 현대시의 한 산맥으로 불릴 만큼 큰 이름입니다. 언어를 다루는 감각은 눈부셨고, 많은 이들은 그의 시에서 한국어가 어디까지 깊어질 수 있는지를 보았습니다. 그러나 그 찬란함의 곁에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 어두움도 함께 남아 있습니다. 그의 이름을 떠올릴 때, 우리는 아름다운 시어만이 아니라 시대 앞에서 흔들렸던 한 인간의 얼굴도 함께 만나게 됩니다.

문학을 작품으로만 보아야 하는지, 아니면 작가의 삶까지 함께 물어야 하는지는 여전히 쉽지 않은 질문입니다. 어떤 이는 예술의 자율성을 말하고, 또 어떤 이는 시대 앞의 책임을 말합니다. 두 주장 모두 나름의 무게를 지닙니다. 그래서 이 문제는 누가 더 날카롭게 말하느냐보다, 우리가 인간을 어떤 존재로 이해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인지도 모릅니다.

성경은 이 복잡한 논쟁 한가운데서 인간을 의외로 단순하고도 깊게 비춥니다. “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.” 이 말씀은 특정 인물 하나를 향한 판결문이 아니라, 우리 모두를 비추는 거울입니다. 누군가의 과오를 말하는 일은 쉽지만, 그 그림자 앞에서 결국 발견하게 되는 것은 닮아 있는 우리 자신의 마음입니다.

그래서 은혜는 어떤 위대한 사람의 추락을 덮어 주는 장식이 아니라, 누구도 스스로를 완성할 수 없다는 사실 위에 내리는 하늘의 자비입니다. 인간의 재능은 눈부실 수 있지만, 그 재능이 인간을 구원하지는 못합니다. 빼어난 언어도, 높은 명성도, 시대를 건너는 작품도 영혼의 결핍까지 채우지는 못합니다. 결국 한 사람을 마지막까지 붙드는 것은 성취가 아니라 은혜입니다.

우리는 누군가를 쉽게 신격화하거나, 반대로 너무 빠르게 정죄하고 싶어합니다. 그러나 복음은 그 두 극단 사이에서 조용히 말합니다. 사람은 높여도 무너지며, 낮추어도 여전히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한 존재라고. 어쩌면 한 시인의 명암을 바라보는 일은, 한 인간의 복잡함을 넘어 우리 모두의 자리를 다시 묻는 일이기도 합니다.

“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” (로마서 3:23)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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